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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선동열(책)

3,394 바이트 추가됨, 2020년 4월 26일 (일) 11:10
9. 정보정치와 메이저리그의 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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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정보정치와 메이저리그의 불발 ===  * 세계선수권대회가 끝나고 일주일 뒤 '고연전'에 나가 3-0 완봉승을 거두었다. 모교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곤 입대를 위해 휴학계를 제출했다.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하지만 사건은 엉뚱한 데서 터져 나왔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는데,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사실상' 협박이었다. 강제였고, 폭력이었다. "휴학계를 당장 철회해라. 정 군대에 가고 싶으면 (남은 두 학기 반) 대학을 마치고 그때 군대에 가라." * 당시 계획은 3년간 군 북모를 마친 다음, 메이저리그에 2년 먼저 입성하는 것이었다. 계획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좌절이었다. 내 야구 인생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안기부라는 국가 폭력의 개입 속에 왜곡되고 말았다. 메이저리그 진출의 강력한 의지가 꺾이는 순간이었다. * 1980년 5월, 군부독재에 저항하여 광주 시민들이 주도했던 '광주민주화운동'과 야구인으로서의 나의 삶은 묘한 접점을 이루게 된다.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군사정권의 총칼 아래 목숨을 잃었다. 호남 사람들은 슬픔과 고통과 정치적 한을 가슴에 안고 살아야만 했다. 해태 타이거즈로 대표되는 프로야구는 일종의 위로였다. 승리는 이들에게 때론 한풀이였고, 씻김국이었다. 국가 폭력과 군사독재에 절망한 호남 사람들에게 해태 타이거즈의 우승은 오지 않는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일과 같았다. * 그리고 2년 반 전에도 그러했듯이, 군사독재의 '보이지 않은 손'은 여전했다. 어쩌면 더 교활했다. 이들에게는 프로야구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었다. 또 다른 의미의 정치요, 공작의 수단이었다. (중략) 휴학계 철회의 망령을 늘 가슴 속에 담고 있었기에 시대가 두려웠고,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광주 사람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채 5년도 되지 않았던 때였다. 망월동의 잔디가 채 자라기도 전이었다. * 나와 부모님은 내 고향 광주를 위해, 군부족재의 총칼 앞에 쓰러져 갔던 고향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진 유일한 재능인 야구를 통해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기로 정했다. 그렇게 해서 해태 타이거즈 선수가 됐다. * 군사독재 관계자들은 호남인들의 정치적 욕구를 프로야구 쪽으로 돌리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야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정치적으로 오염시켰다. 그리고 내 인생을 정치적 도구화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두 차례나 왜곡되고 말았다. * 마운드에서 박찬호는 진정한 카리스마를 보였다. 그러나 마운드 아래에 서면 지극히 예의 바르고 겸손한 청년이었다. 달리 메이저리그 124승 투수가 아니었다. 기억을 되살리자면, 그때 최고참이었음에도 어린 투수들이 궁금해하는 여러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 주고, 일일이 시범을 보여 주던 그 모습이 생각난다. 내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 2006년 WBC 투수코치 시절을 회상하며 
=== 10. 최초의 국가대표 전임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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