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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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일보 문화 섹션에서 연재되고 있는 김지수 대중문화전문기자의 컬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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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16.11.05) 백종원: "아내의 꿈은 새마을 식당에서 함께 밥 먹는 것"

전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04/2016110402384.html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골목 상권이란 게 뭔가요?

“흔히들 골목상권과 음식점이 밀집한 ‘먹자골목’을 혼용해서 써요. 그런데 골목 상권은 먹자골목 중에서도 권리금 없을 정도로 후미진 곳을 말하거든요. 돈 없는 영세민들은 형편에 따라 그런 곳에라도 가게를 차려요. 법은 그 상권의 영세민을 보호하기 위해 대기업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정하는 것이고.

그에 반해 일반 먹자골목은 대기업 프랜차이즈와 자영업자가 같이 경쟁을 해요. 규제도 없죠.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그 대기업 프랜차이즈가 직영점일 경우가 많아요. 그야말로 본사에서 돈을 뽑아가는 거죠. 재래시장 옆에 이마트가 들어온 격이 그런 경우죠.

그런데 가령 30평짜리 고깃집 옆에 30평짜리 새마을 식당이 들어왔다고 쳐요. 그런데 그 프랜차이즈가 본사 직영이 아니고 점주 본인의 것이라면… 같은 보증금에 같은 권리금으로 들어왔는데, 누가 누굴 죽인다고 할 수 있나요? 같은 먹자골목에서, 장사하는 형편도 비슷한 소상공인들끼리, 누구를 더 영세 상인으로 볼 수 있겠어요?”

-반칙은 아니지만 신경이 계속 쓰이긴 하죠. 어쩄든 요즘엔 실제 방송에서도 좀 주눅이 들어 보이더군요.

“조심스럽죠. 그래도 계속하는 건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온도가 달라요. 지금도 기차 타면 한두 칸은 돌아다니면서 같이 사진을 찍어드려야 해요. 그분들 말씀이 “집밥 백선생 덕에 애한테 돈가스 만들어 주면서 안 하던 대화를 하게 됐다." 그래요. 주방에 얼씬도 안 하던 남편이 요리해서 준대요. 그게 가정에 일어나는 작지만 큰 변화잖아요.

저는 음식하면서 제 인성이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엔 먹는 것만 좋아했는데, 실제 주방에서 음식을 해보니 그 고생을 알겠더라고요. 그거 알면 식당에 가서 음식 늦는다고 타박 못 해요. 이심전심으로 기다려 줄 줄 알아요. 자연스럽게 좋은 손님이 되는 거죠. 제가 방송을 시작한 이유도 딴 데 있어요. ‘집밥 백선생'을 보고 집에서 음식을 해보면, 식당에서 가서 주인 마음을 아는 거죠.”

-강연 동영상을 보니 권리금에서 종목 선정까지 굉장히 상세히 답변을 해주더군요. 직원 관리에 대한 답변은 SNS에서 한동안 회자됐었지요?

“쉬운 말로 솔선수범하라는 내용이었어요. 직원을 관리 대상으로 보지 말고 사장 본인이 나서야죠. 사장이 열 발자국 움직이면 직원이 다섯 발자국 움직여요. 그게 딱 정상이에요. 사장이 100을 하는 데 직원이 120을 하면, 위험한 직원이에요. 조만간 독립하거나 뭔가 잘못한 일이 있거나(웃음).”

2.2 (2018.12.15) 요시타케 신스케: "걱정하고 웃고, 또 걱정하다 웃는 게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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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에 그림책 작가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을 했나요?

"광고회사에서 촬영용 인형이나 건물 등 미니어처 만드는 일을 했어요. 퇴근해서 밤에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일러스트를 그렸지요. 취미가 일이 된 셈이에요. 만약 처음부터 그림책 그리는 일을 했으면 오래 못했을지도 모르죠(웃음)."

서른 살부터 마흔 살까지, 그는 퇴근 후 낄낄거리며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걱정 많은’ 어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저는 그림책 작가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심심한 나를 웃겼더니, 우연히 독자가 생기고 작가가 되었어요. 이건 확실히 운이죠. 그런데 운은 우리가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러니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게 다죠. 나를 즐겁게 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해요. 인생은 복잡하지 않아요. 걱정하고 웃고, 걱정하고 웃고, 그런 일의 연속이죠. 그러니 저처럼 용기를 내세요(웃음)."

2.3 (2018.12.27) 유나양: "너는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전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0/2018112001306.html

-왜 고가의 하이엔드를 하지요? 보통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인데요.

"여담이지만 알렉산더 맥퀸 꾸띄르 디자인실에서 일했던 친구가 자기 약혼자에게 저를 소개하면서 그래요. ‘보통 사람은 스타일 스케치 10개를 해오라고 하면 100개를 해오거든. 유나는 달랑 5개만 해와. 재밌는 건 화를 내려다가도 금세 5개의 완성도에 빠져든다는 거지.’ 전 양으로 승부하는 걸 정말 싫어해요. 일하는 스타일도 ‘doing’보다 ‘thinking’이에요."

-게으른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텐데요.

"그게 제 성향에 맞아요. 저는 에너지 낭비를 극도로 싫어해요. 100장 만들어서 10장 뽑는 것보다, 5장을 10장처럼 만드는 게 더 낫다는 거죠. 양보다는 질이 우선이에요. 그런 제 성향을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죠. 제 에너지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웃음)."

-어머니의 부정적인 말에 발끈했군요.

"네. 딱 3개월만 달라고 했어요. 두 달 간 이탈리아에 있는 패션 회사 리스트를 모조리 구해서 팩스로 이력서를 보냈어요. 담당자가 출근하자마자 볼 수 있도록 새벽에 집중적으로 보냈어요. 3~4백 장 정도 보냈는데, 답변이 왔어요. 제가 보낸 스케치 1장이 알비에로 마르티니(베이지색 지도 프린트 가방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눈에 띈 거죠."

-에너지가 많지 않다더니 이력서 3백 장을 보낼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나요?

"하하. 꼭 필요할 땐 에너지를 과감하게 써요. 경력 없는 외국인이 취직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죠."

-많이 싸우면서 브랜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고요.

"네. 저는 기질적으로 불공평한 건 못 참아요(웃음). 공평하지 않다 싶으면 당당하게 나갔어요. 2013년에 타임스퀘어에서 록밴드와 패션쇼를 같이 한 적이 있어요. 워낙 유명한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라 저희 컨디션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요구를 하더라고요. 그때 "그렇게 클레임 할 거면 빠지라"고 했어요. "아무리 너희가 후원을 해도 이건 내 이름으로 나가는 내 패션쇼야!" 정면승부 하니까 그때부터 고분고분해지더라고요(웃음). 서로 존중하고 실력으로 대결하자는 거죠, 저는."

-자기가 만든 옷에 대한 자신감인가요?

"하하. 제가 겁이 없어요. 이번 컬렉션에서 옷이 한 장도 안 팔려도 돼, 그런 마음으로 해요. 그렇게 안 하면 반복하게 되고 안주하게 돼요. 실패해도 된다는 거죠. 실제로 실패도 많이 해봤고요."

-말단 직원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비결이 뭐죠?

"공평하게 대우하는 거죠. 한쪽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면 이 일을 지속할 수가 없어요."

장인이나 제조업자를 지키려는 것과 똑같은 논리라고 했다. "저는 소신이 있어요. 제 옷을 판매하는 지역의 생산자와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하려고 해요."

-매번 그 지역의 생산자와 일한다는 게 가능한가요?

"그럼요. 밀라노에서 일할 때 배웠어요. 가령 일본에 수출할 땐 일본 소재 회사와 계약해서 일해요. 뉴욕에서 제 컬렉션의 90%는 맨해튼의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생산을 하죠. 뉴욕 디자이너들은 맨해튼 34번가에서 42번가까지, 그 지역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해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장인, 하청공장, 원자재 공장, 에이전시 등이 밀집된 ‘가먼트 디스트릭트'를 지키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나서서 임대료 인상을 막기도 해요."

-그런데 킴 카다시안, 켄달 제너를 비롯한 미국의 상류층 고객들은 왜 당신을 좋아하지요?

"동양 여자 디자이너가 꾸준히 하이엔드 브랜드를 만드는 게 흥미로운가 봐요. 아시아 디자이너들은 보통 테일러링에 강한데, 저는 실크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물 흐르듯이 뽑는 걸 잘해요. 기술적으로 드레이핑이 좋다는 평가를 듣죠. 그래서 제 옷은 백인 상류층 출신 디자이너가 만든 것 같다고들 해요(웃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명품이 ‘made in China’인데 반해 ‘유나양'은 ‘made in New York’인 것도 희소가치가 있지요(웃음). 무엇보다 그들은 고급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옷에 대한 취향이 있어요. 제 고객들은 ‘남들이 모르는 걸 나는 안다'라는 특별한 자부심으로 제 옷을 입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예인이 입거나 소셜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꺼리죠(웃음)."

2010년 데뷔 이래 한번도 쇼를 거르지 않은 유나양의 저력이 놀랍다. JFK 면세점, 뉴욕의 삭스 백화점을 비롯해 중동, 일본, 대만 등 전 세계 10개국에서 그의 옷이 팔리고 있다.

-고객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참으로 감사한 존재지요. 20대부터 70대까지 강하고 소신 있는 여성들이 제 옷을 입어요. 청바지 한 벌에 40만 원, 드레스는 3~4백만 원할 정도로 비싸요. 그분들이 옷 한 벌을 사면 20명에게 돈이 돌아가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백화점 판매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가장 귀 기울여 듣습니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당신의 성공 스토리는 많은 청년들에게 모델이 되고 있어요. 롤모델이 된다는 데 부담은 없습니까?

"(낯빛이 어두워지며) 전 다소 걱정스럽습니다. 전 ‘원 오브 뎀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남들이 하지 않은 걸 했어요. 저의 독특한 행로를 따를 필요는 없어요. 외국에서 활동하는 걸 대단하게 볼 필요도 없죠. 세계 어디를 가든 똑같이 치열하고 힘들어요(웃음). 한국은 강대국 중 하나고 인터넷은 세계를 연결하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에선 ‘퇴사하겠습니다' 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예요.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윗세대의 계몽에 대한 저항이자 분노지요. 좀 다른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온 당신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지요?

"열심이라는 말의 의미가 다시 규정돼야 할 것 같아요. 저도 한국에서 청년기를 보냈는데, 어른들은 뭘 많이 하고 시간을 많이 쓰는 행위를 ‘열심’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전 우리 회사 직원들이 출근해서 컴퓨터 켜고 당장 부산스럽게 뭘 열심히 하려고 하면 불러세워요."

-직원들을 저지하는 이유는요?

"출근해서 1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요. 무엇을 할지 생각하라는 거죠. 처음엔 당황하다가 이젠 이해를 해요(웃음). 생각을 정리하면, 뭘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순서가 보여요. 불안하니까 생각을 안 하고 과하게 시간을 쓰고, 그러니까 더더욱 미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죠. 전 ‘열심히 노력해라’는 말 대신 ‘열심히 고민해라’ ‘너 자신과 대화하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 회사는 패션위크 기간 동안을 빼곤 야근이 없어요."

그는 어른들이 하는 "너는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라는 말은 무례라고 했다. 타인이 누군가의 ‘열심'을 규정할 수는 없다고. 그 자신, 열심히 생각하는 중인데 어른들은 왜 가만있느냐고 질타를 했었다고. "삶의 방식이 다양해졌잖아요. 돈 많이 벌고 남 보기 번듯한 직업을 갖고,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누가 그런 삶의 영감을 주었나요?

"언젠가 머라이어 캐리의 전 남편인 닉 캐넌과 협업을 한 적이 있어요. 엔터테인먼트와 운동화 사업 등을 하는데, 그분이 저와 일하는 조건으로 3가지를 내걸었어요. 첫째, 공동작업 작업물에 너의 개성을 확실히 살려라. 둘째, 공립학교의 저임금 자녀들에게 아트와 디자인 마스터 클래스를 해라. 셋째,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해라. 보통은 홍보 인터뷰 몇 회 등을 계약 조항을 거는데 완전히 다른 조건이었죠. 머리가 트이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만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 운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어요."

"주변에서 세컨드브랜드로 확장을 하라고 할 때도 저는 제 스타일을 고수했어요. 저를 믿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어요. 오랜 기간 똑같은 일을 처음의 신조를 지키면서. 그러면 그 추억을 함께 한 사람들이 로열 커스터머가 되고 명품이 된다고 저는 믿어요. 그런 단순한 공정이 하이엔드 브랜드고 디자이너가 할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