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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선동열(책)

3,690 바이트 추가됨, 2020년 4월 26일 (일) 10:57
8.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었다
* 내 인생의 플랜 A는 메이저리그였다. 하지만 1980년대 당시 군부독재와 정보정치의 가혹한 현실, 한국 남자라면 당연히 이행해야 하는 병역 의무, 거기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상처 입은 고향 시민들의 아픔과 슬픔을 달래야 하는 여러 현실이 끝내 나를 플랜 A로 이끌지 못했다. 그래도 나에겐 플랜 B가 남아 있었다. 일본 프로야구 진출이었다. 플랜 A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플랜 B라는 기쁨과 영광이 드디어 내게 안겨진 것이었다. 정말 기뻤고 영광이었다.
=== 8. 메이저리그에 가고 싶었다 ===  * 사실 조별리그 때부터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결승에서 미국을 제압하고 나서부터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뉴욕 양키스가 가장 열심히 접촉해 왔다. 밀워키 브루어스, LA 다저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등도 그랬다. 그때는 에이전트도 없었고, 한국 야구협회 시스템상으로 이 부분을 지원해 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중략)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대에 가야 한다. 그런데 나는 아직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 진출은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군대 다녀와서 나중에 상의하자. 다만 나는 메이저리그에서 꼭 뛰어보고 싶다." * 우승 이후 대학으로 복귀했고, 지루한 합숙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그해 9월 하순경으로 기억한다. 메이저리그 밀워키 브루어스 구단 관계자가 당시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광주 송정리 집까지 찾아왔다. 한국신 전통 안방에서 우리 식의 양반다리를 하고 손님을 맞이했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밀워키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나를 도와줄 수 있는지 부모님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군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그다음 상의합시다. 나는 우리 아들을 꼭 미국에 보내고 싶소. 그리고 우리 아들 생각도 그러하오." * 1981년의 세계청소년대회,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의 성적을 기억하는, 나와 접촉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스카우터들이 이번에도 몰려들었다. 더군다나 대학 교류전이 미국에서 열리고 있었기에 그들의 접촉은 상당했다. 구단 관계자들이 한국인 통역까지 데리고 와 나를 만나 설득을 시도하곤 했다. 이때쯤부터 스카우터들은 한국에서의 나의 형편을 이해하고 있었다. "우린 정말 당신과 함께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병역 의무는 어떻게 하느냐?"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도 그럼에도 나에 대한 관심과 스카우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늘 확인해 주었고, 이는 내게 자부심이자 '선동열 야구'의 원천이 되었다. <nowiki>박찬호 선수가 메이저 리그에 갈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박찬호 선수 자신의 뛰어난 능력 때문도 있었겠지만, 메이저 리그 스카우터들에게 한국을 주목하게 만든 선동열 선수의 영향도 없다고는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위 글을 읽으면서 선동열 선수와 부모님들이 '너무 멀리 생각했던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겨우 책 몇 줄을 읽고 왈가왈부 할 수 없고, <9. 정보정치와 메이저리그의 불발>을 통해 어느정도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 때 사회 분위기를 나는 잘 모르니까 이렇게 단순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고,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를 기다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가서 살면서 일한다고 가정해보자. 영어를 준비해서 간다고 할 때, 절대 완벽히 준비해서 갈 수 없다. 최선의 준비를 해야겠지만, 결국에는 가서 부딪히며 배워야 한다. 군대 문제를 잠시 미뤄두고, '일단 가서 성적이 좋았다면 국민정서 상 군면제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올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뇌피셜을 적어보았다.</nowiki> 
=== 9. 정보정치와 메이저리그의 불발 ===
=== 10. 최초의 국가대표 전임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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