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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말하다(책)

3,736 바이트 추가됨, 2020년 7월 8일 (수) 22:15
편집 요약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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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는 월간지 에디터다. 잡지계에서 일한 지 오래되었고 지금은 디렉터급이다. 언젠가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날 아주 귀찮은 업무가 있었다고 했다. 자기가 1년 동안 뭘했는지 회사에 보고하는 평가서를 써 내는 날이라는 거였다. 아니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잡지를 내왔는데 보면 알지 않냐며 뭘 또 따로 보고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오늘이야말로 정말로 공들여 회사에 생색을 내야 하는 날이야. 회사에 인력이 얼마나 많고 발행되는 잡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그걸 어필도 안 해놓고 회사에서 어련히 알아주려니 하면 안 되지. 자칫하다간 1년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회사에서는 별다른 성과도 못 낸 사람으로 비칠수도 있다고.”’’’ -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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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쪼’가 심한 말투는 상투적이고 매력이 없다. 자연스러움보다는 관성과 습관으로 이루어진 말투다. -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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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생각하지 않아도 후루룩 말이 나올 때, 그 말은 ‘닳고 닳은 말’이 되어 힘을 잃기 쉽다. 동작은 하고 또 하면 숙달되지만 말은 능숙해지기를 경계할수록 좋은 듯하다.’’’ 그게 선생님들이 말했던 ‘쪼가 생기면 안 좋다’는 말의 뜻인 것 같다. 비슷한 말을 하더라도 흐트러지거나 흘러가버리지 않도록, 말이 제 알아서 나오지 않도록, 매번 처음 전하는 말처럼 정성을 기울여야겠다. - 154쪽 === 침묵에 대하여 ===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는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이다. 이런 침묵은 몇몇 가깝고 특별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의 한 형태다. 함께 나눈 수많은 대화와 함께 보낸 수많은 시간의 결과로, 우리 사이에는 실핏줄을 닮은 무언의 통로 같은 것이 생겨나있다. 적어도 서로를 오해하지 않으리라는 신뢰와, 무언가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거기 있음을 안다. 우리보다 압도적으로 큰 것들 - 아름다움, 장엄함, 벅참, 슬픔, 일상 등등 - 앞에서 작아지는 순간들에 침묵이 깃들곤 한다. 이를테면 유독 아름다운 노을을 나란히 바라볼 때, 말은 점점 잦아들고 조금씩 침묵이 차오른다. 때로는 이 와인처럼 감미로운 침묵을 서로에게 천천히 따라주는 것도 같다. 어떤 침묵은 타르처럼 굳어가면서 벗어나고픈 압박감으로 변한다.이 침묵이 그런 종류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은 말로 담아낼 수 없기에 찾아온다. 의미와 경계, 한 줌 언어의 납작한 정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침묵이 촘촘히 들어찬다. 저 낮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른 침묵은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다. 가끔 마주치는 눈빛, 작은 한숨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지 않고 흐르는 침묵은 대화의 완벽하고 더 차원 높은 연장이다. 침묵은 상상하게 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침묵은 공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한다. 좋은 침묵은 각자를 고독 속에 따로 가두지 않는다. 우리는 침묵에 함께 몸을 담근 채 서로 연결된다. 동시에 침묵함으로써 비로소 서로를 돕는다. 침묵속에서 고독은 용해된다. 짧게나마 완벽한 침묵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은빛 실핏줄로 이어져 있다.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에, 누군가했던 말은 기억 속에 새겨지지만 우리가 나눈 침묵은 심장에 새겨진다. - 167~1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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